글
중심잡기가 어렵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흔들흔들 흐느적거리는 햇살과 불빛들. 도시의 차가운 공기를 이겨보고자 담배를 태우는데, 숨이 콱 막힌다. 어느 시인이 말하던 것처럼 '미친듯이 뭔가를 토해낼 듯한 기침'을 몇번이라도 더 하고나면 좀 달라질까?
난 세상에는 크게 세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현재만을 바라보며 그에 충실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 둘째 주로 과거에 시선을 둔 채 묵묵히 탐색하는 사람. 마지막으로는 미래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으로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는 사람. 그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두권의 소설 읽기로 파악컨데 분명 김연수 작가는 ‘과거’로의 여행자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수 많은 저서중에 단 두권으로 평가를 내리는 것이 부끄럽기는 하지만, 앞으로 읽은 책들도 부디 그럴 것 같다)
지난 번 읽었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 80년대와 90년대를 관통하는 작가의 20대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이번 ‘밤은 노래한다’는 시간은 틈을 훨씬 뛰어넘은 1930년대의 만주 지역을 배경으로 한다. 책장을 한 장 씩 넘기면서 내게는, 약품 처리를 한 인화지에 서서히 떠오르는 사진처럼 연상되는 한 인물이 있었다.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패배하였지만, 단 하나 자기 스스로로부터 승리한 조선인 청년, 김산. 갓 대학에 입학하고서 지금껏 미처 접하지 못했던 여러 책들을 읽었는데, 그 중 가장 강렬한 기억을 남긴 책 다섯 권내로 꼽을 수 있는 책이 바로 김산(본명 장기락)의 평전에 해당하는 책 ‘아리랑’이다. (이외에는 ‘전태일 평전’과 지식소매상 유시민의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중국작가 다이호우잉의 ‘사람아 아 사람아’ 그리고는 ‘체게바라 평전’ 이렇게 다섯 권쯤 된다, 20살의 내 기억은) 몇 년 후엔가 송강호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진다는 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지금은 소식조차 알 수 없는 그 ‘책’에서 받은 느낌은 ‘강한 의지’였다. 일제강점의 열악한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분명 지금과는 다른 ‘의지’가 요구되었겠지만, 장기락이라는 인물에게는 만주라는 ‘환경’속에서 스스로를 단련하는 그런 강함이 느껴졌었다. 그리고 그를 회상하게끔 되는 구절
나카시마는 집단의 힘을 믿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개인은 한 집단보다 더 강해질 수가 있는데, 소수의 황군이 중국 육군을 일거에 소탕해버린 것도 다 그런 때문이었다. 나카지마는 말끝마다 ‘렌세이’(연성)란 말을 덧붙였다. 강철이 뜨거운 불에 단련되듯이 인간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완성된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작가도 님웨일즈의 ‘아리랑’을 읽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얻었던 한 조각이 강한 인간들의 모습으로 구현된 것이 아닐까.
이야기의 전체 얼개는 1930년대의 ‘민생단’ 사건이라 불리는 역사와 연결되어 있다. ‘조선인 독립 노선의 공산주의자’와 ‘중국공산당 산하의 조선공산당’ ‘세계차원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라는 복잡한 관계구성 속에서, 결국은 서로를 깊이 신뢰할 수 없었던 ‘독립운동가’들의 분열과 음모, 불신 속에서 와해되어간 과정을 다루고 있는데, 실제로도 500명 이상의 독립운동가가 이 사건으로 목숨을 일었다고 한다. 역사이지만 하나의 이야기 플롯을 가진 이것을 새로운 이야기인 소설로 창작해낸 작가는, 부분부분 주어지는 논문이나 기록을 인용등에서 작가 스스로의 세심함과 결벽을 보여준다.
전투는 지금 일어나는 일에만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만 하는 너무나 강렬한 체험이라 절대로 재현되지 않는다. 수치를 제외한다면 전사(戰史)는 절대로 객관적으로 회고되지 않는다. 전쟁담은 세계가 얼마나 주관적인 곳인지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전쟁의 참혹함과 비인간성을 비난하는 많은 사람들도, 역사속의 여러 전쟁을 쉽게 삶속에서 재현해내지 못한다. 그곳에 있는 것은 암기의 대상화 될 분이다. 전쟁을 경험한 자와 경험하지 못하는 자 사이에는 저 하늘의 은하수보다도 긴 간극이 있다. 더군다나 그 전쟁으로 누군가를 잃어야만 했던 사람들에게는 더욱 간절한 기억이다. 그러한 내용들을 외신의 기사 클로징 멘트처럼 구성해낼 줄 아는 작가의 힘, 김연수 작가의 문장은 깔끔하면서도 힘이 있다.
그리고, 이야기에 흐르는 또 하나의 맥락, 사랑. 이정희라는 매력적인 여성은, 내 스물 무렵의 지독한 열병을 생각나게끔 한다. 지금도 얼굴이 화끈 거릴만큼 부끄럽도고 소중한, 그리고 아직도 어찌 사는지 궁금한 그녀, 소설 속 이정희의 모습에 그 친구를 포개어보며 책을 덮는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책을 읽는 행위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가 일정수준의 사회를 구성하고 그나마 ‘사람다운’꼴로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먹고 싸고 자고, 더불어서 일하거나 하는 모든 일상에서는 시간이라는 연료가 기본으로 소비되지만, 그 중에서 독서에 소모되는 ‘시간’은 그 궤를 조금 달리한다. 일종의 ‘여유’ 가미된다는 말이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접해도 크게 무리가 없는 보는 텔레비전 드라마나 쇼프로그램과는 달리, 일정 깊이에 빠져들기 위한 준비운동도 있어야 하고, 또 행간에 걸친 의미를 재구성해낼 수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책에도 다양한 층위가 있지만) 그럼 의미에서 김연수의 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그 시간과 여유를 꽤나 요구하는 작품이다. 문체가 난해하거나 어렵다기 보다는, 인물과 사건, 서사의 배치가 너무 견고하고 탄탄하기에, 흔히 지하철에서 볼 법한 문고본처럼 편하기 읽히지는 않는다, 하지만 분명하게 작가의 철학이 담겨있고, 사회적인 의식이나 근현대사의 파편들이 얽히있는 이 작품은 분명 본질적인 면에서 ‘순수한’소설이다. 지나친 기교를 부리거나 파격적인 형식과 설정으로 흥미를 쫓지 않는 그런 진짜 소설
민족 자주와 해방의 언어가 아직은 낭만이던 시대.
2000년대 학번으로 아주 ‘희귀하게도’ 대학 학생회의 물을 먹은 마지막 운동권세대인 나에게도 조금은 어색함을 주는 ‘학원 자주화 추진위원회’나 ‘주사파’ 등의 설정은 작금의 20대에겐 이해되기 어려운 부분일 듯도 싶다. 물론 그러한 운동권에 대한 설정이 내용 이해에 무리를 주는 것은 아니다, 단지 지나치게 80-90년대의 프레임에 갖힌 듯한 느낌을 주는 감이 없지 않다.(소설속의 배경이 90년대 초반이며 등장인물들의 그 이전을 반추하는 형식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일지도)
당시에는 미처 자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6월 항쟁이 있었던 1987년부터 분신정국이 펼쳐졌던 1991년까지 사 년에 걸쳐, 그 동안 한국사회를 완강하게 지탱해온 뭔가에 불길이 지펴지면서 그 불꽃이 화려하게 타올랐다가 장엄한 모습 그대로 몰락해갔다. 그게 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언론에서는 그게 공산주의적 세계관의 몰락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속단하는 기사를 썼지만, 그들은 분신정국 이후 상실의 늪에 빠진 운동권을 향한 고소의 심정만으로 그 기사를 썼지, 그들 역시 돌이킬 수 없는 몰락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 몰락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배신이라고 불렀고, 또 어떤 사람들은 패배라거나 승리라는 단어로 표현했고, 더 심각한 혹은 더 우스운 사람들은 포스트모던이라고 지칭했다. 뭐라고 부르든 그 단어들이 지시하는 바가 죽음, 상실, 몰락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처럼 정체가 불분명한 프로파간다는 죽은 것은 바로 역사라고 재빠르게 선언함으로써 그 죽음을 입도선매하려 들었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정체가 불분명한 다른 프로파간다들을 제외하고는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들은 그 ‘죽음’을 독점하려 했으나 그들 역시 한 시대의 구성원인 이상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 ‘죽음’과 ‘상실’과 ‘몰락’은 동시대인들에게는 절대적으로 주관적이었다. 그러므로 애당초 선언 따위로 객관화될 수는 없었다. 동시대인들은 임상적으로 그 ‘죽음’과 ‘상실’과 ‘몰락’을 제 몸 안에서 앓는 수 밖에 없었다. 그건 프랜시스 후쿠야마를 되뇌던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시대는 그 이전과 이후의 맥락속에서 규정된다. 6월 항쟁의 에너지가 넘쳐나던 87년에서 동구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이 있던 90년대 초까지의 시대는 분명 ‘대변혁’의 시기였다. 좌파와 자유주의 세력에게 조금 만 더 힘이 있었더라면 프랑스의 ‘68혁명’과 맞먹는 큰 변화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20여년을 지나고 있는 지금 바라보기에 ‘6월 항쟁’의 가치를 너무 높게 평가했던 것이 아닐까한다. 국가 내부 에너지에서 발생한 변혁의 기운이 외적인 조건의 변화로 좌절되는 과정을 거친 것이지. 과연 김지하의 ‘내부비판’은 온당한 것이었을까?
가을 대동제의 마지막 행사는 학교 중앙광장에서 열린 노래공연이었다. 비장한 선율의 오르간 소리와 함께 희생된 자들을 추념하는 여학생의 낭랑한 목소리로 시작된 그 공연은 서서히 혁명적 낙관주의를 찬양하는 노래들로 이어지다가 결국 거기에 모인 학생들이 모두 참여하는 집단 군무로 바뀌었다. 그때 나는 학생회 사무실에서 내려오다가 그 광경을 보게 됐다.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오렌지빛 햇살이 드리워진 가운데 수백 명의 학생들이 노랫소리에 맞춰 일제히 두 팔을 흔들며 같은 동작을 취하는 모습은 감동을 넘어 오싹할 지경이었다. 그건 완전한 해방의 느낌 그 자체였으므로 나는 우리에게 다가와 “그런 식이라면 너희들은 행동은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 중년 남자의 두려움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중년 남자의 말은 옳았다. 완전한 해방이란 사적인 쾌감과 관계된 것이므로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궁극적인 해방은 다른 존재들과의 단절을 통해서 나타난다는 아이러니. 전국민이 붉은악마가 되어 축제를 벌였던 2002년 월드컵은, 철처히 외국인들을 배제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은 개인의 영역에서 해방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강력범죄를 저지르는 어떤 인간심리의 이면엔 ‘해방’의 감정이 한 축을 차지하지 않을까.
나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던 그날부터 역사는 실시간 중계되기 시작했다고 생각해. 그렇게 되기 시작하면 우리는 눈을 떼지 못하고 시청할 수밖에 없는 거잖아. 그게 자본주의의 미디어가 하는 일이야. 우리를 역사의 시청자로 만드는 것.
우리가 가장 강렬한 정보로 기억하는 것은 전쟁. 1차 이라크 전쟁 당시, 텔레비전에 연일 방송되던 미국의 습격장면을 아직 난 기억한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우울증, 강한 상대에게 품게 되는 열등감, 선한 사람이 마땅히 가지는 죄책감 등이 압도적인 폭력의 시기를 만나게 되면 때로 납득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때의 나로서는 어디서 어디까지를 일컬어 사랑이라고 말해야 할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지만, 1980년대에 많은 사람들이 다른 감정들, 예를 들어 증오심이나 복수심, 혹은 공명심 등을 사랑으로 오인한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므로 이 아무런 의지도 지니지 못하는, 폭력적 시대의 도구에 불과한 인간을 향해 우리가 지니는 연민의 감정은 절대로 사랑이랄 수 없었다. 그건 증오심과 복수심에 딸려 나오는 여분의 감정일 뿐이었다.
이것을 ‘민주화 세력’에 대한 부채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 ‘민주화 세력’의 무능론 탓에 좌파는 좌파대로, 우파는 또 우파대로 분리되어 나간 결과가 작금의 정치현실.
폭력적 체제에서 비폭력은 멸시의 대상입니다. 오직 폭력만이 찬양받을 수 있습니다. 찬드리카는 타밀호랑이에게 자살폭탄테러는 불가피하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타밀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타밀호랑이에게 자살폭탄테러를 전수한 헤즈볼라와 같은, 다른 이슬람 무장단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편으로는 우리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난 5월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살해한 것은 분단체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죽음으로 내몰린 상황이었지만, 스스로 살해했다고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쨌든 그게 자신에 대한 살인이라는 걸 알지 못했던 겁니다. 그게 라지브 간디뿐만 아니라, 자신을 살해하는 일이라는 걸 다누도 몰랐겠지요. 폭력적 체제가 개인의 문제라고 제가 말하는 까닭은 이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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